서론: 고구려 멸망 이후 새로운 질서의 형성
668년, 고구려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이후 동북아시아는 급격한 정치 지형의 변화를 겪게 됩니다. 고구려 유민들은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으며, 그 중 일부는 대조영을 중심으로 새로운 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바로 발해(渤海)의 성립입니다. 발해는 단순한 고구려의 후계국이 아니라, 고구려의 계승자이자 당과 일본, 돌궐 등 여러 세력과의 외교와 군사적 관계를 통해 동북아의 중요한 강국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글에서는 발해의 성립 배경, 건국과 발전 과정, 동북아시아 각국과의 외교 관계, 그리고 발해가 남긴 역사적 의의와 유산을 소제목 4개로 나누어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 고구려 유민과 대조영 - 발해 성립의 씨앗
▶고구려 멸망과 유민의 분산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후, 유민들은 당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인해 산동, 내륙 지방, 그리고 요동 일대로 흩어졌습니다. 하지만 이들 중 일부는 고구려의 정신과 독립성을 유지하며 재기의 기회를 모색하였습니다. 특히 말갈족과의 연합은 새로운 정치 세력 형성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대조영의 등장과 배경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말갈계라는 설도 존재하지만 대체로 고구려계 유민이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대조영은 698년 동모산(東牟山) 지역에서 말갈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당군을 격퇴하고 독립 정권을 수립하였습니다. 이것이 발해의 출발점이 됩니다. 이 사건은 '천문령 전투'로 불리며, 고구려 부흥의 상징적 승리로 평가됩니다.
▶발해 건국
대조영은 스스로를 '진국왕(震國王)'이라 칭하며 나라를 세웠고, 이후 당으로부터 발해군왕(渤海郡王)이라는 책봉을 받으며 국제적인 승인을 얻게 됩니다. 국호는 초기에는 '진(震)'이었으나, 이후 '발해'로 바뀌며 독립국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됩니다.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명확한 인식 아래 정치, 문화, 제도 면에서 고구려의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체제를 갖추어 갔습니다.
2. 발해의 성장과 국가 체제 - 고구려의 계승과 당의 수용
▶중앙집권 체제의 강화
발해는 건국 초기부터 중앙집권적 체제를 갖추어 나갔습니다. 문왕 대흠무 시기에는 당나라의 3성 6부제를 모방한 중앙 관제를 정비하였고, 수도 상경용천부를 중심으로 5경 15부 62주의 지방 행정 체계를 마련하였습니다. 이는 당의 제도를 수용하되, 고구려의 전통적인 지방 조직과 절충한 형태로 평가됩니다.
▶고구려 계승의식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 국가임을 공식적으로 천명하지는 않았지만, 문화와 제도, 외교 태도 등에서 고구려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왕실의 성씨 '대(大)'는 고구려 귀족의 전통을 잇는 것으로 해석되며, 발해는 고구려의 멸망 이후 사라진 북방 계열의 고대 국가로서 정체성을 강화하였습니다.
▶경제 기반의 확보와 수도 이전
발해는 농업과 수공업, 해상 무역을 기반으로 한 경제 체제를 강화하였고, 이를 통해 국력을 증대시켰습니다. 문왕 대에는 수도를 중앙에 가까운 상경용천부로 옮기면서 교통, 정치, 군사적 효율성을 높였습니다. 상경용천부는 당시 중국의 장안, 신라의 경주와 견줄 만한 대도시로 발전하였습니다.
▶다민족 통합 체제
발해는 고구려 유민뿐 아니라 여러 말갈족, 한족, 거란족 등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다민족 통합을 위해 유교적 통치 이념과 율령 체계를 수용하고, 지역마다 자치적 성격을 부여하면서 유연한 통치를 시도하였습니다.
3. 동북아 외교 관계 - 강국 사이의 균형 외교
▶당나라와의 외교와 갈등
발해는 초기 당과의 관계에서 충돌을 겪었지만, 점차 사대 외교를 기반으로 한 안정된 외교 관계를 구축했습니다. 문왕은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면서도, 외교 문서에서는 '발해국왕'으로 낮추어 표현함으로써 현실적인 외교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발해는 당과의 사절단 교류를 지속하며 문화적, 경제적 교류도 활발히 이루었습니다.
▶신라와의 긴장과 경쟁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국으로서 신라와의 관계에서 우월성을 주장했으나, 신라는 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발해를 견제했습니다. 양국은 국경 분쟁과 문화적 경쟁 관계 속에서도 일정한 교류는 유지했으며, 후대에는 결혼 동맹이 있었을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일본과의 적극적인 교류
발해는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습니다. 일본과는 7차례 이상의 사절단 교환이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발해는 자신들의 국력을 과시하고 국제적 정통성을 강화하는 전략을 펼쳤습니다. 일본은 발해를 고구려의 후계 국가로 인식하며 일정 부분 우호적인 태도를 유지했습니다.
▶유목 세력과의 관계 – 거란, 돌궐 등
발해는 북방 유목 세력인 돌궐, 거란, 말갈 등과도 복잡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충돌하며 자신들의 북방 방어선을 유지하였고, 군사적으로도 적극적인 대응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북방 방어를 위해 군사 도시와 성곽 체계를 강화했습니다.
4. 발해의 역사적 의의와 유산 - 잊힌 제국의 재조명
▶고구려의 정신적 계승자
발해는 고구려 멸망 이후 북방 고대 국가 전통을 계승한 유일한 국가였습니다. 고구려의 정치적·문화적 이상을 다시 세우고, 고대 한국사의 영토를 만주와 연해주까지 확장시킨 점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성과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발해는 남쪽의 신라와 함께 '남북국 시대'를 형성한 실질적 이원 체제의 한 축이었습니다.
▶문화의 융합과 발전
발해는 당 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고유의 문화를 창조해 나갔습니다. 특히 불교와 유교, 무속 신앙이 공존했으며, 도자기, 건축, 금속 공예 등에서 독자적인 예술 수준을 이룩했습니다. 발해의 수도 유적지에서는 당시의 문명 수준을 보여주는 유물이 다수 출토되고 있습니다.
▶국제 정세 속의 자주적 외교
발해는 당, 일본, 신라 등 주변 강국들과 자주적인 외교를 펼치며 고대 동북아 정세 속에서 독립성과 주체성을 유지했습니다. 이는 고대 한국사가 단순히 중국의 주변사가 아닌, 능동적인 주체로서 국제 관계를 형성했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현대적 재조명과 통일 역사 인식
일제강점기와 분단 이후, 발해는 한국사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발해를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인정하고, 남북국 시대의 북방 중심 국가로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강화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영토 인식을 보다 입체적으로 확장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결론: 고대 동북아의 숨겨진 제국, 발해
발해는 단순히 고구려의 유민 국가가 아니라, 국제 정세 속에서 자주성을 지키며 당당히 존재했던 고대의 제국이었습니다. 복잡한 외교 전략, 중앙집권 체제의 구축, 다양한 민족의 통합과 문화적 창조는 발해가 결코 단순한 주변국이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우리가 발해를 기억하고 조명하는 이유는, 그것이 과거의 역사이기 때문이 아니라 미래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구성하는 중요한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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