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동학의 등장과 농민의 분노, 배경을 보다
19세기 후반 조선은 외세의 압력과 내부 부패가 동시에 격화되던 시기였다.
서양 열강의 본격적인 동아시아 진출, 청과 일본의 세력 다툼, 그리고 국내적으로는 부정부패, 탐관오리, 삼정(전정·군정·환곡)의 문란이 극에 달해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람이 곧 하늘이다(人乃天)”라는 사상을 바탕으로 민중의 희망이 된 것이 바로 ‘동학(東學)’이었다.
동학은 1860년 최제우가 창시한 종교이자 사상 운동으로, 유·불·선과 민간신앙을 포용한 새 종교였다. 그는 신분을 가리지 않고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강조하였고, 당시 억압받던 농민과 하층민 사이에서 급속히 퍼져나갔다. 특히 1890년대 들어 2대 교주인 최시형의 활동과 접신 체험을 통해 조직적 기반이 강화되면서, 동학은 단순한 종교를 넘어 사회 개혁의 정신적 중심축으로 발전한다.
이와 동시에, 전라도 일대의 농민들은 극심한 세금 착취와 토호세력의 횡포, 일본 상인의 이권 침탈에 시달리고 있었다. 고부 군수 조병갑의 악정, 만석보 축조와 물세 부과 사건 등은 도화선이 되었고, 결국 1894년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농민 봉기가 일어난다.
2. 제1차 봉기: 고부에서 전주성까지, 백성이 들고 일어서다
1894년 3월,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농민군은 전라도 고부에서 봉기하였다.
그들은 탐관오리의 축출, 조세의 정상화, 노비 해방 등을 외치며 빠르게 지역 군현을 점령했고, 황토현 전투와 황룡촌 전투에서 관군을 연파하며 기세를 올렸다. 이어 전주성을 점령함으로써 농민군의 요구가 단순한 폭동이 아니라 체제 개혁을 목표로 한 명확한 정치 운동임을 천명하게 된다.
전봉준 등 동학 지도부는 무력으로 체제를 뒤엎기보다 개혁을 요구하며, 정부에 다음과 같은 12개조 폐정개혁안을 제시한다.
▶ 주요 폐정개혁안 예시:
- 탐관오리를 처벌하고 청렴한 관리 임명
- 부당한 세금 철폐 및 균등 과세
- 노비 문서 소각
- 토지 평균 분배
-일본 상인의 내륙 통상 금지
이러한 요구안은 농민들이 단지 생존을 위한 저항을 넘어 새로운 사회질서를 갈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상황은 곧 급변한다. 전주성 점령 이후 정부는 농민군과 전주화약(全州和約) 을 맺어 개혁을 약속하며 일시적으로 사태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동시에 청나라와 일본 양국에 군사 지원을 요청한다.
3. 청·일의 개입과 제2차 봉기: 다시 들불처럼
전주화약 직후, 조선 정부가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일본군이 한반도에 상륙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청·일 간의 이해 충돌이 격화되었고, 그 결과가 바로 '청일전쟁(1894)' 이다. 이 전쟁의 전장 가운데 하나가 다름 아닌 조선이었다.
이처럼 자주 개혁을 요구하던 동학농민운동은 국제적 열강 다툼에 휘말리는 형국이 되었다.
동학 지도부는 일본의 군사 개입과 강화도 조약 이후 늘어난 이권 침탈에 분노하며, 1894년 9월 제2차 봉기에 돌입한다.
이번에는 단순한 지방 반란이 아니라, ‘왜적을 몰아내고 나라를 바로세우겠다’는 반외세 구국 운동의 성격을 띠었다.
이들은 ‘보국안민(輔國安民)’, ‘척왜양(斥倭洋)’을 외치며 전국 각지로 확산되었고, 병력을 재편해 대대적인 공세에 나섰다.
특히 공주 우금치 전투(10월 28일)는 결정적인 전투였다. 하지만 일본군과 관군 연합에 밀려 대패했고, 이를 계기로 동학군은 급속히 붕괴되기 시작한다.
4. 전봉준의 최후와 운동의 종결
우금치 전투 패배 이후 농민군은 급속히 분열되었고, 지도자 다수가 체포되거나 탈출하게 된다.
전봉준 역시 도주 중 체포되어 고문과 심문 끝에 1895년 3월 24일 교수형에 처해진다.
그는 사형 직전 “백성의 배고픔이 나라를 뒤엎게 한 것이다. 내가 나라를 배반한 것이 아니라 나라가 백성을 배반한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동학농민운동은 무력 진압으로 끝이 났지만, 이는 조선 말기 가장 조직적이고 정치적 목적이 명확했던 민중운동이었다.
5. 동학농민운동의 성격: 혁명인가, 민란인가?
역사적으로 동학농민운동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과거에는 단순한 농민 반란이나 폭동으로 간주되었으나, 현재는 근대 시민사회의 싹을 틔운 정치·사회적 혁명운동으로 평가받는다.
✔ 운동의 주요 성격
- 반봉건 운동: 부패한 조선 조정, 토호 세력, 탐관오리를 제거하려 함
- 반외세 운동: 일본의 침략적 개입, 청나라의 군사 개입 모두 거부
- 민중의 자치 실험: 전라도 지역에 집강소 설치 → 자치행정 실현
- 사상적 기초: 동학의 인내천, 민중 중심의 평등사상
이러한 점에서 동학농민운동은 조선 후기 사회개혁의 정점이자, 근대 국민국가로 이행하는 전환기적 사건으로 자리 잡고 있다.
6. 동학농민운동이 남긴 유산
① 민중의 정치의식 성장
이 운동은 수천 년 신분제 속에 살던 백성들이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주체적 시민의식의 시작이었다.
② 근대 개혁 사상의 발아
폐정개혁안은 단순한 요구사항이 아니라, 당시 농민들의 사회구조 개편에 대한 구체적 상상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는 후일 갑오개혁과 독립협회, 3.1운동, 농민운동 등으로 사상적으로 이어졌다.
③ 한국 근대 민족운동의 출발점
반봉건과 반외세를 동시에 외쳤다는 점에서, 동학농민운동은
대한민국 민족운동의 출발점으로 간주된다.
이는 훗날 항일운동, 농민운동, 민주화 운동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7. 마무리하며: 조선의 마지막 민란에서 시작된 희망
동학농민운동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그것은 무력의 한계 때문이 아니라 시대의 조건 때문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운동이 민중 스스로 세상을 바꾸려 했던 최초의 집단적 시도였다는 점이다.
봉건 권력에 저항하고, 외세에 맞서며, 스스로의 공동체를 조직했던 그들의 노력은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와 시민의식의 뿌리가 되었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동학의 정신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것은 더 이상 종교나 사상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존엄과 평등, 자주정신을 향한 실천의 철학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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